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에 있는 분황사는 원효가 주석하면서 수많은 경전을 저술하였으며, 그의 아들 설총이 아버지를 화장하여 그 재로 소상을 만들어 모셔두었던 곳이다.  또한 원효대사의 위업을 기리는 화쟁국사비편이 있으며, 보광전에는 원효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는데......


분황사 앞에서 - 황룡사터와 당간지주

[분황사 앞 당간지주]

      동학 창시자 수운 최제우선생님의 용담정과 가정리를 뒤로하고 927번 국도를 따라 동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나는 경주시내로 들어섰다. 오른쪽으로 황성공원을 끼면서 우회전하여 북천을 건너가면 나지막한 기와지붕의 경주 역이 왼쪽에 나타난다. 경주 역에서 좌회전하여 원효스님의 본격적인 무대였던 분황사를 찾아온 것이다. 예전에도 몇 번은 들렀건만 그때는 느낄 수 없었던 설렘과 벅찬 감격이 끌어 올랐다. 위대한 스승을 만날 수 있다는 감격인가보다.

    분황사 맞은 편에는 그 옛날 찬란한 신라의 영광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숨겨진 황룡사지가 있다. 발굴작업인지 복원작업인지 황룡사지로 들어가는 덤프트럭을 따라 일어나는 희뿌연 먼지는 그야말로 황룡이 승천하듯 아님 승천의모습을 감추는 연기와도 같았다.  먼 눈길을 황룡사 터에서 가까이 분황사 입구로 옮겨오면 키높이의 당간지주가 벌판에 서 있다. 당간지주는 사찰경내 전면에 법당(法幢)을 10미터 가까이높이 달아 세우는 당간을 지탱하기 위해 중간에 2~3개소와 꼭대기에 구멍이 뚫려 있어 양쪽에 세운 2개의 받침대를 말하는 것으로 대체적인 형태는 지주(支柱) 밑에 사각형의 대석(臺石)이 마련되고 지주 사이에 원형 간대(竿臺)를 놓아 지주를 고정시켰다. 분황사의 당간지주는 특이하게도 당간을 받치는 간대를 거북이로 만들어 놓았다 한다.

분황사

분황사

[분황사 정문]

      황룡사와 담을 같이 하고 있는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634)에 건립되었으며 우리 민족이 낳은 위대한 고승 원효와 자장이 거쳐간 절이다. 643년에 자장이 당나라에서 대장경의 일부와 불전을 장식하는 물건들을 가지고 귀국하자 선덕여왕은 그를 분황사에 머무르게 하였다. 또 원효는 이 절에 머물면서 [화엄경소] ,[금광명경소] 등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또 원효가 죽은 뒤 그 아들 설총(薛聰) (자는 聰智, 원효의 아들로 신라 3문장(强首, 薛聰, 崔致遠)중 한사람이며 벼슬은 한림(翰林)에 이르고 이두를 집대성하였다.)은 그의 유해를 부수어 진용(眞容)을 소상(塑像)으로 만들어 분황사에 모시고 항상 공경사모하며 예배를 올렸다한다. 아들 설총이 예배할 때마다 소상은 고개를 돌려 돌아보았다 하여 그 소상을 고상(顧像)이라고 불렀다. 일연(一然, 1206 - 1289, 고려 때 스님. 이름은 견명(見明). 호는 무극(無極), 뒤에 일연(一然)이라고 개명함. 생계불감 불계부증(生界不減佛界不增)이라는 화두를 참구하다가 활연대오하여 "오늘에야 3계가 몽환(夢幻)같고 대지가 무극(無極)함을 보았노라."하였다. 세수 84세 때 손으로 금강인을 맺고 입적. 삼국유사5권, 어록 등 많은 저서를 남김.)이 삼국유사를 쓰던 고려 말에도 그 고상은 있었다고 한다. <삼국유사 권4 원효불기조>

      고상 이야기는 설총이 아버지를 얼마나 극진히 사모했느냐 하는 것을 말해 주는 것으로 그를 사모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를 향해서나 돌아다보는 것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물론 고상이 없다. 그러나 원효의 흥미진진한 생애와 관련하여 한결 그의 따스한 인품을 돋보이게 하는 이야기이다. 원효는 신라 지역의 명산을 두루 편력하고 경관이 좋은 곳에 암자를 짓고 수행하였다. 그러나 그의 중요한 저술들은 분황사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좌전 북쪽 벽에 있었던 천수대비 그림은 영험이 있기로 유명했다한다. 경덕왕 때 희명의 다섯 살 난 아이가 갑자기 눈이 멀자 아이를 안고 천수대비 앞에 가서 '도천수대비가'를 가르쳐주고 노래를 부르면서 빌게 하였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 벽화가 있었다고 하며, 경덕왕 14년(755)에는 무게가 30만6,700근이나 되는 약사여래입상을 만들어서 이 절에 봉양하였다고 한다.

사리탑

분황사 경내 북쪽 담결에 있는 대원심보살 사리탑, 1933년 대원심보살 살아계실적 치아에서 백옥 부처님 모양의 사리가 나와 온 세상이 경탄하여 그 불도 정성을 기리고자 사리함을 모셨다한다.

석등과 대석 같은 많은 초석들과 허물어진 탑의 부재였던 벽돌 모양의 돌들이 입구 오른쪽 담벽에 쌓여 있다. 

      역사가 오랜 분황사에는 허다한 유물이 있었을 터이나 몽고의 침략과 임진왜란 등으로 모두 유실되었고, 지금은 분황사에 둘러놓은 어른 키 만한 담장 위로 석탑의 윗부분만이 보이는 자그마한 절이 되었다. 현재 분황사 경내에는 분황사 석탑과 화쟁국사비편, 삼룡변어정이라는 우물들이 있으며, 석등과 대석 같은 많은 초석들과 허물어진 탑의 부재였던 벽돌 모양의 돌들이 한편에 쌓여 있다.   대한 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불국사 말사인 분황사는 이 시대 원효대사의 위대한 생애와 정신을 되살리기 위해 [원효학 연구원]을 설립하여 스님의 교학과 사상을 발현하고 진작시켜 나가고 있다. 또한 매년 음력 3월 29일이면 경내에서 원효성사대재를 열며 금년 10월과 11월중에는 원효 예술제와 원효학 연구학술 발표회를 개최한다고 한다.

분황사 모전석탑

[분황사 모전석탑]

      안산암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높이 9.3m의 모전석탑이다.

      분황사 창건 당시 만들어진 석탑이 임진왜란 때 반쯤 파괴되었는데, 조선시대에 이 절의 중이 수리하려고 하다가 도리어 더욱 파손시켜 1915년 다시 수리를 하였다.  현재는 3층으로 되어 있으나 원래는 7층 혹은 9층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기단은 한 변 약13m, 높이 약l.06m로 크기가 제각기 다른 막돌로 쌓았다. 밑에는 상당히 큰돌을 쌓았고 탑신 쪽으로 갈수록 경사가 급해지고 있다. 기단 위에는 화강암으로 조각한 동물 한 마리씩을 네 모퉁이에 배치하였는데, 동해를 바라보는 곳에는 물개, 내륙으로 향한 곳에는 사자가 있다.

      현재 탑신부는 3층까지 남아 있으며, 탑신은 위쪽이 아래쪽보다 약간 좁다.1층 네 면에는 입구가 열려 있는 감실을 만들어 놓았으며 입구 양쪽에 인왕상을 세웠다. 인왕산은 불탑이나 사찰의 문 양쪽에서 불법을 지키는 신으로써 금강역사라고도 하는데 분황사 모전석탑에는 동서남북 네면에 있는 8명의 인왕상은 모두 반라이며 옷 무늬가 각기 다르다. 전체적으로 불법을 수호하는 신답게 막강한 힘을 느끼게 하는 조각으로 7세기 삼국시대의 조각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탑의 1층 네 면에 감실을 만든 것은 목탑의 뜻을 살린 것이다. 현재 감실 안에는 머리가 없는 불상이 놓여 있는데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2층과 3층은 1층에 비하여 높이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국보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다.

분황사 모전석탑 인왕상- 남쪽

[분황사 모전석탑 인왕상-동]

[분황사 모전석탑 인왕상-남]

[분황사 모전석탑 인왕상-서]

[분황사 모전석탑 인왕상-북]

[분황사 모전석탑 인왕상-서]

[분황사 모전석탑 인왕상-북]

삼룡변어정

      모전석탑과 보광전 사이에는 관광객의 목을 축여주는 2단의 연화 식수대가 있고 그 옆에 팔각의 석정(石井)이 있다. 이 우물은 신라시대의 유물로 안은 둥글고 바깥은 팔각으로 다듬어져 있는데 둥근 모양은 부처님의 원융(圓融)한 가르침이며, 팔각은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활, 바른 노력, 바른 의식, 바른 명상인 팔정도(八正道)의 가르침을 상징하고 있다. '호국룡변어정'으로 불리는 이 우물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분황사 삼룡변어정

[삼룡변어정]

      원성왕 11년(795) 여름에 온 나라가 가뭄이 들어 여러 곳에서 기우제를 지낸 후 간신히 비가 와 한시름 놓고 있던 왕은 당에서 온 사신을 맞았다. 한 달이나 묵고 있던 사신을 전송한 왕은 `이번 사신은 아무래도 이상해. 당나라에서는 우리나라에 경사가 있어 축하하러 보내든지, 당나라 왕의 글을 보내기 위해 사신을 파견해 왔는데, 이번에는 별 볼일 없이 한 달이나 묵고 황급히 떠나니 무슨 영문인가'하고 근심을 하였다. 한편 당나라 사신이 간 후부터는 신라에 때아닌 서리가 내려 곡식들이 얼어붙었다. 근심스런 심정을 달래 보려고 산책을 하고 있던 왕 앞에 문득 아름다운 두 여인이 나타났다.

    두 여인은 공손히 절을 올린 후 이렇게 말했다.

      "임금님 저희들은 동지(東池)와 청지(靑池)에 사는 두 호국용의 아내입니다. 어제 당나라 사신이 하서국(河西國)사람들을 데려와서 우리 남편과 분황사 팔각정(八角井)에 사는 호국용을 주문을 외어 작은 물고기로 변하게 한 후 통 속에 넣어 가지고 길을 떠났습니다. 폐하께서 급히 하서국 주술사에게 명령하여 우리 남편들과 분황사 호국용이 다시 청지와 동지 그리고 분황사 팔각정에 살게 하여 주십시오"하였다.

      신라인들은 이들 세 호국용이 있는 한 신라는 번성한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그제야 왕은 당나라 사신이 온 까닭을 알았다. `세 호국룡이 있는 한 신라가 당나라에 고분고분 복종하지 않을 것을 알고 사신을 보내 훔쳐 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왕은 "알았으니 돌아가 있거라"하여 두 여자를 보내고 날랜 기마병 50명을 몸소 거느리고 당나라 사신을 뒤쫓아갔다. 쉬지 않고 달려서 해가 저물어 어두워지려 할 때야 사신들이 묵고 있는 하양관에 이르렀다. 왕은 이 곳 객사에 잔치를 베풀어 놓고 당나라 사신에게 말했다.
      "한달 동안이나 계시다가 이렇게 이별하게 되니 너무 섭섭하여 단 한시간이라도 더 즐겁게 석별의 정을 나누고 떠나시게 하기 위해 이렇게 뒤를 쫓아왔습니다"하며 술을 권하였다. 당나라 사신은 조금 마음이 불안하였으나 왕이 용의 사건을 알지 못하는 눈치였으므로 안심하고 하서국 사람들과 몇 번이나 고맙다고 인사하면서 권하는 술을 마셨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다음 왕은 부드럽게 당나라 사신에게 말을 하였다.
      "풍토가 다르고 풍속이 다른 나라에 가면 무엇이나 기념으로 갖고 싶은 것은 사람들의 상정일 것입니다. 귀관께서 우리나라의 용을 갖고 싶은 것은 이해하겠으나..."하고 노기를 띠고 언성을 높여 호령하였다. "하서국 네놈들은 호국용을 저주하여 훔쳐다가 팔아먹다니 네놈들은 이 자리에서 사형에 처할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큰 소리에 하서국 사람들은 물고기가 들어 있는 대통을 내어놓고 목숨만 살려 달라고 빌었다.
      외국 사신 앞이라 특별히 살려주는 것이니 돌아가라 하고 왕은 대통을 받아 들고 돌아와서 세 곳에 놓아주자 물 속에서 제각기 한길이나 뛰고 기뻐하며 뛰놀다가 가 버렸다. 당나라 사신은 원성왕의 명철함에 감탄하여 본국으로 돌아가서 "다시는 용을 훔칠 생각을 아니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하고 저의 임금께 아뢰었다 한다. 이때부터 분황사 우물을 팔각정이 아닌 삼룡변어정이라 했다 한다. <삼국유사 권2 원성대왕조> 남아있는 신라 우물 가운데에서는 가장 크고 우수한 것이다.

화쟁국사비편

화쟁국사비편

분황사 모전석탑과 화쟁국사비편

대성사 화쟁국사 원효의 비편, 비신을 사라지고 비신을 받쳤던 비대만 남아있다.

분황사의 모전석탑과 보광전 사이에 나무밑에 화쟁국사비편이 있어 소홀한 사람은 그냥 치지기가 쉽다.

    모전석탑과 삼룡변어정 사이의 시원한 나무그늘아래에는 관광객의 피곤한 다리를 쉴 수 있기에 안성맞춤인 대좌가 놓여져 있다. 다행히 걸터앉은 사람은 없지만 한편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은 이 대좌를 무심하게 그냥 지나친다. 이 대좌는 바로 고려 시대 때 만들어진 원효스님의 화쟁국사 비대좌이다. 숙종6년(1101) 8월 원효와 의상이 동방의 성인인데도 불구하고 비석이나 시호가 없어 그 덕이 크게 드러나지 않음을 애석하게 여긴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 A.D.)은 숙종에게 권하여 숙종은 원효에게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와 함께 유사로 하여금 주처에 비석을 세우라는 조서를 내린다.   하지만 이 조서가 바로 시행되지 않은 듯하고, 이곳에 건립된 비문은 명종대의 한문준에 의해 지어졌다 한다.  그 뒤에는 방치되어 있은 듯 비신(碑身)은 사라지고 비신을 받쳤던 비대(碑臺)만 절 근처에서 발견되자 조선시대의 김정희가 이를 확인하고 비대좌 위쪽에 '차신라화쟁국사지비적'(此新羅和諍國師之碑蹟)이라고 써놓았다.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으면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다. 준비 없이 찾아온 관광객에게는 결코 보이지 않는다.

보광전

분황사 보광전

분황사 경내 유일한 전각인 보광전에는 약사여래불과 원효영정이 모셔져 있다.

      정면3칸 측면2칸, 맞배지붕을 가진 분황사경내의 유일한 전각인 보광전은 강희 19년(1680년) 경신년 5월 초3일 중건하였다한다. 며칠후면 부처님 오신날이어서 홍청황의 연등으로 장식된 지금의 보광전을 1998년 3월 13일(음 戊寅 2.14) 개축을 해체하던 중 3월 24일 상량문과 벽화가 발견되었는데 분황사는 임진왜란 때 불타고 현재의 약사여래상은 만력 기유년(1609년)에 동(銅) 5,360근으로 조성되었다 한다. 보광전 안의 약사여래상 오른쪽에는 원효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경산 자인의 제석사에 모셔진 원효 영정은 일본 고산사 영정의 사본이라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지만 분황사 원효 영정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 대표적 영정으로 해방 직전 한 거사가 200일 기도를 올리던 중 원효의 모습이 화폭에 나타나 그대로 따라 그렸다고 전해진다.

      위대한 사상가이시며 우리민중의 스승이신 원효대사 영정 앞에 삼배를 올리고 칠칠일(사십구일)전에 돌아가신 선친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연등 하나를 달아주실 것을 보살님께 부탁드리고 늦지 않기 위해 길을 나섰다.

     경북 경주시 구황동 312번지 대한 불교 조계종 분황사
    전화 054-742-9922   전송 054-742-9937
    원효학 연구원 홈페이지
    http://www.wonhyo.org

    (2001 / 문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