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눌을 찾기 전에 의천을 찾아간다. 조계산을 사이에 두고 있는 송광사가 지눌의 도량이라면, 선암사는 의천의 도량이다. 교관겸수, 내외겸전으로 교종과 선종의 일치를 강조하신 고려의 왕자님, 대각국사 의천을 보슬비 내리는 선암사에서 찾는다. (2001년 5월 6일)


의천 스님을 찾아서 - 조계산 선암사와 의천스님

조계산을 찾아서

[조계산 선암사, 송광사 가는 길]

    초의선사 일지암의 정감에 취하여 저녁이 늦어졌다. 대흥사 아래 마을에서 저녁을 먹고 이제 지눌스님을 찾아 조계산 송광사로 간다. 오늘밤은 아무래도 스님을 뵙지 못할 것 같다. 하지만 그 언저리에라도 가서 스님의 '정혜결사'하신 뜻을 생각하고자 낯선 밤길을 달린다. 해남에서 강진으로 그리고 보성으로, 남도끝자락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2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벌교에서 왼쪽으로 꺾어 27번 국도를 타야만 조계산 송광사로 갈 수 있다. 그러나 초행의 밤길이라 지나쳐버렸다. 하는 수 없이 순천시내에 들어갔다. 오늘밤은 그 언저리조차도 못 가겠다. 승주(昇州)에서 물어 조계산 동쪽의 선암사로 들어갔다.
    오늘 일을 다 끝내고 저녁 배도 채웠으니 아쉬울 것도 없다. 다만 일행이 등 붙이고 눈 붙일 작은 거처만 있으면 더 바랄 것 없다.

태고종과 보우스님

    때론 실수가 다행으로 다가온다. 계획에 없던 선암사이지만, 선암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돌다리가 있다는 절 아닌가! 또한 조계산 서쪽의 송광사가 한국불교의 최대 종파인 조계종(선종)의 대표적인 총림이라면, 이곳 선암사는 둘째 종파인 태고종(교종)의 가장 대표적인 사찰이지 않는가!  송광사가 보조국사 지눌스님의 도량이라면 선암사는 대각국사 의천스님의 도량이지 않는가! 지눌스님과 의천스님을 같이 방문할 수 있는 것 또한 무척 다행스런 일이다.

    태고종은 석가모니를 종조로 하고 보우(普愚, 1301∼1382)스님의 종풍(宗風)을 선양하려는 종단으로서 대처승(帶妻僧, 처와 자식이 있는 스님)제도를 인정하고 있다. 태고 보우스님은 선교일체론(禪敎一體論)을 주장하고, 선과 교를 다른 것으로 보던 당시의 불교관을 바로잡고, 불교와 유교의 융합을 강조하였던 고려시대의 국사(國師)이시다.

선암사의 승선교

승선교

[선암사의 승선교]

    조계산 선암사(仙巖寺) 아래 마을에서 민박을 하였다. 새벽같이 서두는 이웃방 관광객들의 분주함으로 일찍 일어났다. 산사로 들어가는 길 왼편으로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와 키 큰 나무들의 서늘함을 벗삼아 아침 일찍 선암사를 찾았다.

    보슬비가 내린다. 바람소리 물소리가 발걸음을 재촉하여 부지런히 올랐다. 작은 돌다리를 지나쳐 눈앞에 나타난 큰 무지개 돌다리에 발걸음이 멈추었다. 계곡에 목욕하고 승천하는 선녀들의 모습을 닮았다하여 승선교(昇仙橋, 보물 제400호)라 불리는 이 돌다리를 목수 신영훈씨는 [절로 가는 마음]에서 '푸른 이끼 가득한 홍예(虹霓)다리가 설빔한 아이처럼 홍의녹상한 채로 다소곳이 거기에 서있다'고 말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돌다리로 평가받는 무지개 돌다리에 흡족하여 선암사는 마음에도 없었다. 준비 없이 올라와 만난 비 때문에 절 입구에서 발걸음을 되돌려 내려왔다. 애당초 마음에 없다보니 보슬비도 좋은 핑계거리가 되었다.

    선암사는 542년(진흥왕3)에 아도(阿道)가 창건하였다고도 하고, 875년(헌강왕5)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였다고도 한다. 고려시대에는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중건하였다.

대각국사 의천

의천스님

[대각국사 의천]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스님은 고려 문종의 넷째 아들이셨다. 열한 살 때 문종이 왕자들을 불러 놓고 '누가 출가하여 복전(福田)이 되겠느냐'고 물었을 때 자청하여 출가를 하였다. 어린 나이에 출가한 왕자는 대승과 소승의 경·율·론 삼장(三藏) 뿐만 아니라 유가 및 제자백가의 사상을 섭렵하며 공부하였다. 스님은 천태교학을 열심히 연구하고 교관겸수(敎觀兼修)로써 교선합일을 주장한 새로운 천태종(天台宗)을 개창하셨다.

    화엄종계통의 승려임에도 불구하고 천태종을 개창하신 까닭은 천태 지의(538∼597)의 근본사상인 회삼귀일(會三歸一, '셋이 만나 하나로 돌아가고')·일심삼관(一心三觀, '하나의 마음으로 셋을 본다')의 교의로써 국가적 기반을 공고히 하고, 선(禪)과 교(敎)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고려의 불교는 선·교 양종의 대립이 심각하였는데 의천은 이러한 고려불교의 폐단을 바로잡아 교단을 정리하고, 정도를 밝혀 올바른 국민사상을 확립시키려고 하였던 것이다. 선종이 안에서 구한다면 교종은 밖에서 구한다. 안팎이 각기 주장할 적에 의천스님은 내외겸전(內外兼全)으로서 공부할 것을 가르쳤다.

    1101년(숙종 6) 10월 5일, 문병 온 형왕(兄王) 숙종에게 "원한 바는 정도를 중흥하려 함인데 병마가 그 뜻을 빼앗았나이다. 바라옵건대 지성으로 불법을 외호(外護)하시와 여래께서 국왕, 대신에게 불법을 외호하라 하시던 유훈을 받들어 행하시면 이 몸 죽어도 유감이 없나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나이 47세, 법랍 36세로 입적하였다. 선암사에는 조선후기의 도일비구(道日比丘)가 그린 대각국사 의천의 진영(보물 제1044호. 110.2×144cm)이 보존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