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눌스님은 송광사를 만들었고, 송광사는 지눌을 안고 있다. 돈오점수, 정혜쌍수의 결사선언 현장 속에서 지눌을 찾는다. 시대적 갈등을 번뇌하며 사회통합을 위해 헌신적으로 실천하며, '마음이 곧 부처라'며 제 마음 찾기를 역설하신 목우자 지눌 스님을 이제 찾는다.


지눌 스님을 찾아서 (3) - 지눌의 삶과 죽음

[보조국사 지눌영정]

지눌스님의 삶

    스님께서는 고려 의종(毅宗) 12년(1158) 황해도 서흥군에서 아버지 정광우와 어머니 조(趙)씨 부인 사이에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병이 많아 약을 써도 소용이 없었는데 부모가 "병이 나으면 출가시키겠다"하고 부처님께 기원을 드렸더니 병이 금새 나았다 한다. 그래서 그는 어려서 선종 계통의 종휘(宗暉)선사에게서 머리를 깎고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 그는 스스로의 호를 목우자(牧牛子) 곧, '소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불교에는 자신의 마음을 소[牛]에 비유하여 소를 찾아[尋牛] 길들이고[牧牛],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서는[騎牛歸家], 결국 소도 잊고 자신도 모두 잊어버리는[忘牛存人] 과정을 묘사한 10단계 그림이 있는데 이를 심우도(尋牛圖)라 한다. 스님의 호 '목우자'는 바로 심우도의 네 번째 그림 '목우도(牧牛圖)'에서 비롯된 것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을 찾아 길들이고자 하셨던 스님의 뜻을 담고 있다.
    스님이 사셨던 12세기의 고려 불교는 정치세계의 혼탁한 물에 오염되어 승려들의 기강이 흐트러지고 타락되어 가는 모습이었다. 안으로는 선(禪)과 교(敎)가 서로 대립하여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스님의 말씀을 빌려보자.

       "우리들의 일상 소행을 돌이켜보면 어떠한가? 불법을 빙자하여 나와 남을 가리면서 이기적인 일에 구차스럽고 풍진 속에 빠져 도와 덕은 닦지 않고 옷과 밥만 축을 내니 비록 출가했다고 한들 무슨 득이 있겠는가. 아아 삼계를 떠나려 하면서도 속세를 벗어날 수행이 없으니 다만 사내의 몸을 받았을 뿐 장부의 뜻이 없도다. 위로는 도를 넓히는 일에 어긋나고 아래로는 중생을 이롭게 하지 못하며 중간으로는 네 가지 은혜를 저버렸으니 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스님의 삶을 기리는 비석에 보면, '소 같이 걷고, 호랑이 같이 본다(牛行虎視)'는 말이 있다. 스님의 삶을 표현하는 말이다. 이에 스님은 바로 호랑이의 냉혹한 눈으로 당시 불교의 현실을 바라보셨다. 그리고 타락한 불교를 바로잡아 부처님의 법을 바로 세우기 위해 결의하였다. 그것이 타락한 불교를 일신하려는 정혜결사 운동이다.
    스님은 25세에 당시 출세의 관문인 승려 과거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출세의 길과는 달리 10여명의 동지들과 더불어 불교를 바르게 잡는 정혜결사를 맹약하였다. 이제 '소같이 걸으면서' 묵묵히 실천으로 옮기는 일 뿐이었다.

    젊은 지눌스님은 서울인 개경을 등지고 내려와 전라도 경상도 등의 절에서 [육조단경]과 [대장경]을 읽고 깨달음의 세계로 한 걸음씩 내디뎠다. [화엄경]을 읽은 스님은 선교일치의 진리를 얻게 되고 감격한 나머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면서 책을 머리에 이고 방안을 돌았다한다. 선종과 교종의 갈등이 얼마나 심했으며, 또한 스님은 이 문제에 고뇌하며 해결하고자 얼마나 노력하였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는 드디어 외쳤다.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禪是佛心  敎是佛語)" 라고. 마음은 말씀으로 나타나고 말씀은 마음을 담고 있다.
    물론 중생들의 마음은 '길들여지지 않는 소'와 같아서 제 마음조차도 제 마음대로 되지 않아, 말따로 마음따로 이겠지마는 어디 부처님이야 그러실 리가 없다. 부처님의 마음과 말은 한 손의 손바닥과 손등과 같은 것이다. 선종과 교종도 이와 같아 서로 다르지 않고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임을 스님은 깨우쳤다. 이 깨우침의 기쁨과 경험을 널리 전하고 선과 교의 일치를 도모하려는 것이 정혜결사의 출발이 되었다.

[지눌스님의 목욕신발]

    나이 33세 때에 팔공산 거조사(영천 은해사 거조암)에서 8년 전에 결의한 정혜결사를 본격적으로 실천에 옮기게 된다. 일종의 시국선언문과 같은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발표, 독자적인 사상을 확립, 불교 쇄신운동에 눈떴다.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에 동조하는 뜻 있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스님은 물론 재가신도, 하물며 유교와 도가의 사람들도 동참하였다 한다. 많은 사람이 수용하기 위해 넓은 도량(道場)을 찾게 되었다. 그 결과 지금 내가 찾고 있는 송광사(宋廣寺)를 찾게 되었다. 그때가 1200년, 스님의 나이 43세 때였다.
    팔공산의 정혜결사도 그대로 옮겼으나 인근에 정혜사(定慧寺)라는 절이 있어 혼동되므로 수선사(修禪社)라고 고쳐 불렀다. 산의 이름도 송광산에서 조계산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에서 스님은 생을 마칠 때까지 정혜결사 운동의 완성을 위하여 '소의 걸음'으로 일관하였다. 그런 결과 그는 독특한 목우가풍(牧牛家風)을 확립하였으니 한국 불교전통의 새로운 정립이다.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 한국 불교 조계종의 연원이 되었다. 그러면 지눌스님께서 확립한 한국 불교의 새로운 전통은 어떠한 것일까? 이를 위해 지눌스님의 정혜결사 기본 정신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지눌스님의 정혜결사

[권수정혜결수문 경판]

    정혜결사의 운동은 새로워지려는 자기 반성의 정신이며, 참정신으로 돌아가려는 개혁의 정신이다. 이는 종교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기의 마음을 바로 찾아 바로 닦는 일에 정진할 것을 강조한 정법결사(正法結社)이며 수심결사(修心結社)이다.

     dia_gray.gif 정혜결사의 첫째 정신은 '심즉불(心卽佛)'이다.
    '마음이 곧 부처'란 것을 바르게 찾고 바르게 닦는 것으로 우리는 속 좁은 중생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마음 밖에서 부처 찾는 일은 마치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이 무모한 일이라며 스님은 가르치셨다. [권수정혜 결사문]에서 스님은 이렇게 말한다.

       "모두 잊는 것이 선정이요, 모두 비추는 것은 지혜이니, 선정과 지혜가 고르면 어느 마음이 부처가 아니며, 어느 부처가 마음이 아니겠는가.  마음과 부처가 그러할 때에는 온갖 대상과 온갖 반연(絆緣)이 모두가 삼매일 것이니, 누가 다시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여 높은 소리로 부처님을 부를 필요가 있겠는가."

    dia_gray.gif 둘째는 '돈오점수(頓悟漸修)'이다.
    본래 마음에 대해 눈을 뜨고 '마음이 부처'란 것을 단박에 깨닫고[頓悟] 난 후에라도 꾸준히 그 마음 닦는 일[漸修]을 게을리 말아야 한다. 스님께서는 '깨달음[悟]은 마치 햇빛과 같이 갑자기 만법이 밝아지는 것이고, 닦음[修]은 거울을 닦는 것과 같이 점차 밝아지는 것과 같다'는 비유를 들면서, 만일 깨우치지 못하고 수행만 한다면 그것은 참된 수행이 아니라는 입장에서 선오후수(先悟後修)를 강조하였다. [수심결]에서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돈오는 비록 부처와 동일하나 다생(多生)의 습기가 깊고, 바람은 멈췄으나 물결은 아직 출렁이고, 이치는 나타났으나 망상이 그래도 침범한다. 반야(般若)로써 공과 노력을 더하지 않으면 어떻게 무명을 다스려 아주 쉬는 경지에 이를 수 있겠는가?"

[지눌스님  권수정혜결사 선언도]

[정혜결사 수선도 - 승보전 벽화]

    dia_gray.gif 셋째는 '정혜쌍수(定慧雙修)'이다.
    '마음이 곧 부처'란 사실을 어떻게 깨달은 것인가? 이는 선정과 지혜로 함께 해야 하는 것이다. 선정(禪定)은 마음을 비우고 본래 마음에 하나되는 것이며, 지혜(智慧)는 마음을 환히 밝게 가지는 것이다. 본래의 마음은 본래 비었기에 밝은 것이다. 정혜결사란 바로 선정과 지혜로 함께 닦아 본래의 '마음이 곧 부처'란 것을 바르게 깨닫기 위한 결사이다. 스님은 [수심결]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선정은 본체요 지혜는 작용이니, 본체인 작용이기 때문에 지혜는 선정을 떠나지 않고 작용인 본체이기 때문에 선정은 지혜를 떠나지 않는다.  선정이 곧 지혜이기 때문에 고요하면서 항상 알고, 지혜가 곧 선정이기 때문에 알면서 항상 고요하다."

    dia_gray.gif 넷째는 '이타행(利他行)'이다.
    정혜결사는 선정과 지혜로 본래의 마음이 부처란 것을 깨닫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부처되는 자기 완성에 그치는 것이 참 불교는 아니다. 참 불교는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보살행과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자비를 실천해야 한다. 지눌스님의 정혜결사는 바로 이웃과 사회 완성을 위한 이타행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dia_gray.gif 다섯째는 '원융회통(圓融會通)'이다.
    교종과 선종이 각기 자신만이 옳다며 갈등과 대립으로 참 불교에서 멀어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스님은 [화엄경]에서 교·선 일치의 단서를 찾고 둘은 서로 통하며 하나로 만날 수 있다고 기뻐하였다.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선은 부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의 말씀이다.[禪是佛心 敎是佛語]"

     중생의 마음은 그렇지 않지만, 부처의 마음은 말씀과 다르지 않다. 말씀 속에 마음이 담겨 있고 마음은 말씀으로 나타나니 이 둘은 같은 것이다. 그것을 바로 찾고 불교가 하나 되어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정혜결사의 정신이다.

    dia_gray.gif 여섯째는 '수기설법(隨機說法)'이다.
    각자의 능력과 소질에 맞는 수행으로 부처님의 바른 법에 가까이 갈 수 있다. 어떤 이는 경전으로 다가가고, 어떤 이들은 문자의 장애를 뛰어넘는 화두참선으로 다가가고, 어떤 이는 염불과 보살행으로 부처님께 다가갈 수 있다. 지눌스님의 정혜결사는 바로 교종의 수행법과 선종의 수행법 등이 사람들의 근기(根機)에 따라 다양하게 열려 있는 수행(修行) 교실이며 각자의 능력과 소질에 맞는 가르침[隨機說法]인 것이다.   

    마음[心]과 부처[佛]가 하나되고, 깨우침[悟]과 닦음[修]이 하나되며, 선정[定]과 지혜[慧]가 하나되며, 자(自)와 타(他)가 하나되고, 교(敎)와 선(禪)이 하나되는 정혜결사의 전통은 바로 원효스님의 일심화쟁(一心和諍)·원융회통(圓融會通)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이러한 회통적 조화의 정신은 고려의 불교를 새롭게 탄생시켰으며, 한국 불교를 부처님의 정법 세계로 다가가도록 인도하는 전통을 확립하였고 나아가 한국 정신의 가장 두드러진 전통을 세운 것이다.

    스님의 저서에는 《진심직설(眞心直說)》 《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 《계초심학입문(誡初心學入門)》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염불요문(念佛要門)》 《상당록(上堂錄)》 《법어》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竝入私記)》 등이 있다.

[지눌스님의 '목우자 심결' 경판]

    오늘날 지눌스님의 사상은 근래에 범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한다. 스님의 어록이 1983년 하와이 대학에서 영문으로 번역 출간되었으며 (Robert Buswell ,  The Korean Approach to Zen : The Collected Works of Chinul ,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3), 지금까지 외국 대학에서 스님의 사상을 주제로 나온 박사 학위 논문만 해도 수편이 된다. 이처럼 세계는 지눌스님의 창의적 사상에 깊은 관심과 찬사를 보내고 있다. 우리는 스님과 같은 선인이 이 땅에 계셨었다는 사실에 자랑스럽게 알아야 할 것이다.   

지눌스님의 죽음

    보조 스님 지눌의 마지막 모습은 인상적이다. 스님의 생애를 전하는 비석의 글, 불일보조국사비명(佛日普照國師碑銘)에 의하면 스님께서는 돌아가시기 한 달쯤 전에 "내가 이 세상에 있으면서 법을 설하는 것도 오래 않을 것"이라며 제자들에게 각자 노력할 것을 당부하셨다.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도 제자들과 밤이 이슥하도록 진리의 말씀을 나누셨다. 이윽고 날이 밝자 큰북을 쳐 송광사 안에 대중들을 법당에 모이게 했다. 그리고 향을 사르고 예불한 뒤에 육환장을 들고 법상에 오르시어 평일처럼 설법하시되,

[불일보조국사감로비]

      '이 눈은 조상으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고,
      이 코도 이 혀도 그렇다.
      이제 이 산승의 목숨을 대중에게 맡기니,
      찢든지 자르든지 마음대로 하라.'

    이때 한 제자가 여쭈기를 "스님의 병환이 저 유마거사의 병과 같습니까, 다릅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스님은 "너는 같고 다른 것만 배웠는가?"라 하시며 들고 계시던 육환장으로 법상을 쾅쾅 하고 두어 번 내리치신 다음 "일체의 모든 진리가 이 가운데 있느니라"하고는 육환장을 들고 법상에 앉으신 채 조용히 열반에 드셨다. 이때가 1210년 3월 27일(음), 세수 53세, 법납 46세이었다.

    제자들이 향을 피우고 등을 달아 공양하기 이레가 되었으나 안색은 살아 계실 때와 같이 수염과 머리털이 조금씩 자랐다고 한다. 다비를 마치고 사리를 수습하니 큰 것은 30과요, 작은 것은 무수였으며, 북쪽 봉우리에 탑을 세웠다. 왕은 스님이 입적했다는 소식을 듣고 못내 슬퍼하며, 시호를 불일보조국사라 하고 탑호를 감로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