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은 퇴계 이황선생님 탄생 500주년이다. 선친의 탈상, 극락왕생 기원의 사십구일재일을 앞두고 퇴계 선생님을 만나고자 길을 나섰다.  퇴계 선생님 가까이 하회마을에서 하룻밤 등을 붙이고 내일이면 선생님을 만나야겠다. (2001년 4월 21일-22일)


퇴계 선생님을 찾아서 (1)-하회마을

[퇴계 선생님을 찾아가는 길]

    상중(喪中) 죄인이 되어 선친(先親)의 탈상(脫喪) 극락왕생(極樂往生)을 기원드리는 사십구재일을 앞두고 여행을 떠난다. 나 지금 살고 있는 경기도 고양에서 고향 경상도 포항으로 내려가는 길에 우리 옛 선현들의 체취와 얼이 서려있는 그 현장을 거치면서 선현들의 유훈도 새기고 또한 인근한 절에 들러 선친의 극락왕생을 기도하리라는 작은 서원(誓願)을 하면서 아내와 딸아이는 뒤에 내려오라하고 혼자서 먼저 길을 나섰다.

    청주의 충북대학교 대학원에 들러 여러 선생님과 자리를 하다가 늦은 오후에서야 안동으로 출발하였다. 길 가르쳐 주신대로 25번 국도를 따라 서쪽 청주에서 동쪽 보은, 상주로 가다가 3번 국도를 타고 북쪽 점촌으로 올라갔다. 점촌에서 다시 동쪽으로 34번 국도를 타고 예천으로 들어갔다. 지는 해를 등지고 바라본 완연한 신록의 산수와 농촌의 평화로운 풍경은 참으로 이 강산이 금수강산이구나하는 느낌을 가져다 주었다. 늦은 시각 어디에서 저녁을 때우고 등을 붙일까 생각해보니 안동의 하회마을만 한 곳이 없었다. 이 곳에 들러 하룻밤 등을 붙이고 내일 아침이면 일찍 도산서원에 들러 퇴계선생님을 만나리라 계획하였다. 또한 그렇게도 가고 싶었던 하회마을이 아니던가?

하회마을과 엘리자베스 여왕

      해는 지고 별들은 잔잔히 떠오르며 관광객 모두가 떠나버린 늦은 시각에 나 홀로 하회마을에 차를 몰고 들어갔다. 강 건너인가 좀 먼 듯한 곳에서 젊은이들의 마이크 소리와 풍물패 소리만이 하회를 벗삼은 듯하다. 이런 복이 다 있는가? 이래도 되는 건가? 순결한 민족혼을 지키고 있는 깨끗한 이 마을(?)을 나 혼자서 차를 몰고 다니면서 이 골목 저 골목을 헤집어 놓는다. 이래도 되는 걸까 모르겠다. 우선, 끼니를 때우고 등을 붙일 곳을 찾아야 한다는 일념뿐이다. 혼자 여행을 떠나 혼자 잔다는 것이 낯선 나에게는 조금은 긴장된 밤이었다.

하늘에서본 하회마을

[하늘에서 바라본 하회마을 : 낙동강(화천)이 태극문양을 그리면서 마을을 휘돌고 있다. ]

    다행히 골목 앞에서 한 분의 할머니, 아니 내 어머니보다 조금 더 나이 드셨으니 아주머니라 불러야겠다. '아주머니 이 동네 밥 먹고 민박할 만한 곳 있습니까'라고 여쭈었다. 다행이다. 아주머니께서는 민박을 구하는 늦은 나그네를 기다리고 계셨다. 주린 배는 뒷집 아주머니께 의지하고 피곤한 등은 앞집 아주머니께 의지하게 되었다. 된장찌개에 나물로 비빈 밥을 어찌나 맛있게 많이 먹었는지 배도 꺼주고 혼자하는 여행의 멋도 부릴 겸하여 짐을 풀어놓고 갈 곳도 없는 밤마실(밤나들이)을 나섰다. 마을 앞을 태극문양처럼 휘감아 흐르는 강가로 나가보았다. 강가 만송정의 솔밭(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이 솔밭을 '쑤'라고 불렀다)을 넘어 강모래 밟으며 물길을 느껴볼 양 물가로 내려갔다. 겸암정사와 옥연정사를 좌우에 끼고 있는 부용대 수직 암벽과 흐르는 듯 멈춘 듯한 강물에 별빛 달빛만 고요하여 아침나절에 두고 온 아내와 아이가 벌써 그리워졌다. 그러나 이 얼마만의 평온함인가, 돌아가신 선친께서 이 죄인에게 주신 평온함이 아닌가? 아버지께서도 이 좋은 곳에 놀러 와 보셨던가, 내 아내는 물론이거니와 ............ 평화로운 혼자만의 여행이 한 편으로는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하회마을고샅

[하회마을 고샅길 : 진흙담 돌담으로 얽히고 설킨 고샅길을 만들어낸 사람 사는 초가집과 살지 않는 기와집들]

    진흙담 돌담으로 얽히고 설킨 고샅길을 만들어낸 사람 사는 초가집과 살지 않는 기와집들 사이사이를 조용히 조용히 돌아다녔다. 밤이라서 그런가 초행길이라 그런가 미로처럼 얽혀 길을 잃고 다니다가 어쩌다 나온 길이 바로 내가 등 붙일 그 집이 아닌가! 때마침, 영국의 엘레자베스 여왕이 다녀간 일주년이라 하회마을에 축제가 있다는 현수막과 분위기가 한참이다. [영국신사와 조선 선비의 만남]이라는 현수막도 내걸었다. 내일 일요일이면 도회지에서 엄청 많은 사람들이 몰려올 것 같은 기세이다. '영국 여왕방문 일주년', 그래서 또 축제라? 참 재미있는 마을이구나 싶었다.  

명당 하회마을의 역사

하회마을전경도

[하회 마을 전경도]

    풍천 화산(꽃뫼)으로 뒤를 두르고 화천(꽃내, 낙동강)으로 앞을 휘감듯 에두른 하회마을은 옛부터 큰인물이 많이 나온 명당중에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송정

[만송정 : 하회마을의 수려한 풍광과 예스러운 분위기가 연출하는 포근한 아름다움에 힘과 권위를 더해주는 '쑤'(솔밭)]

부용대

[부용대(芙蓉臺) : 하회마을 앞 만송정 솔밭에서 꽃내(화천) 건너 맞은 편의 병풍처럼 드리우며, 왼쪽자락에 겸암정사와 오른쪽자락에 옥연정사를 좌우로 끼고 있다.]

겸암정사

[겸암정사 : 부용대(芙蓉臺) 왼쪽 자락에 얹혀있는 겸암 류운룡의 정사]

    "시냇가에 살만한 곳으로는 영남 예안의 도산(陶山)과 안동의 하회(河回)가 제일이다. 도산은 두 산이 합치어 긴 골짜기를 이루어서 산이 그다지 높지 않고, 골짜기 어귀에 큰 시내가 흐르는가 하면, 골짜기에는 고목(古木)이 무척 많아서 한아(閒雅)하고 시원스럽다. 퇴계(退溪)가 거처하던 암서헌 두 간 옛집이 아직도 있는데, 집 안에는 퇴계가 쓰던 벼루, 문갑, 지팡이, 신발 등 유물이 간직되어 있다.

    하회에는 서애(西厓) 유성룡의 옛집이 있다. 황강(黃江) 물이 휘돌아 흘러 마을 앞을 머물러서 깊어진다. 수북산(水北山)이 학가산(鶴駕山)에서 갈라져 와서 강 위에 둘러 있는데 모두 수려한 석벽이다. 위에는 옥연정과 작은 암자가 암석 사이에 점철되어 있고, 온통 소나무 전나무로 덮여 있어 참으로 절경이다."

    그렇다. 이곳은 바로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과 겸암 류운룡(謙唵 柳雲龍, 1539-1601)이 나신 곳이다. 이 곳이 바로 풍산 류씨들의 마을이 아닌가?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판(杯盤)에'라는 말이 있듯이 하회마을에는 류씨만 아니라 김해 허씨, 광주 안씨도 함께 살았다한다. 그러나 허씨들이 처음 이 마을을 개척했고, 안씨들이 문중을 이루었는데, 나중에 들어온 류씨들이 잔치판 흥청일 정도로 가문을 번성시켰다는 앞의 말처럼 마을 앞을 흐르는 꽃내(화천) 하안의 지금 하회마을은 류씨들의 세거지로 중심을 잡게 되었다한다.

퇴계선생님의 제자 - 겸암 류운룡과 서애 류성룡

      신혼의 설레이는 첫날밤처럼 내일 만나게 될 퇴계 선생님을 그리면서 가져간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와 [퇴계선생과 도산서원] 책을 들추다가 밤늦은 시각에 잠이 들었다. 오랜만에 뜨뜻한 온돌방에 등을 붙이니 피곤이 녹은 듯 사라졌다. 그러나 나를 깨운 것은 설렘도 아니고 가뿐한 기운이 아니라 이른 아침부터 '산불조심'하자며 떠들어대는 마을 확성기 소리였다. 어찌된 일인가? 우리나라 대표적 민속마을인 하회마을의 일요일 아침은 산불조심하자는 확성기 소리로 짜증스럽게 깨어난다. 내 어릴 적 잠을 깨운 '새마을노래'가 문득 스쳐갔다.

북촌댁

[하회마을 북촌댁 : 중요민속자료 제 84호로 지정된 이 집은 경상도 도사를 지낸 석호 류도성이 철종 13년에 창건한 것으로 안채와 사랑채 사당채 대문간채를 두루 갖춘 전형적인 앙반집이다.]

북촌댁솟을대문

[북촌댁 솟을대문 : 7칸의 대문간은 그 중앙에는 솟을대문을 두었으며 몸채와 대문간과는 축을 달리하고 있다.]

북촌댁 입춘방

 [북촌댁 입춘방 : "서일상운 화풍감우(瑞日祥雲和風甘雨)" - 상서로운 햇살 상서로운 구름, 화사한 바람 달콤한 비" - 풍년을 기원함)

[간고등어구이 가시발라 먹여주시는 내 어머니같은 아주머니의 깊은 인정과 뜨뜻한 구들장같은 하회의 그 마음을 깊숙이 간직한 채 나는 퇴계 선생님을 향한 길을 재촉하였다.]

     카메라와 캠코더를 어깨에 걸치고 마을 앞 솔밭에서 강건너 맞은 편의 병풍처럼 드리워진 부용대(芙蓉臺)좌우를 살피고 왼쪽 자락에 얹혀있는 겸암정사(謙庵精舍)를 눈에 넣었다. 겸암 류운룡은 퇴계선생님이 도산에 서당을 열었을 때 제일 먼저 찾아가 배움을 청하였으며, 학문적 재질과 성실한 자질로 퇴계선생님의 총애를 많이 받았다. 부용대 남쪽 기슭에 정사를 지어 학문에 정진할 적에 퇴계선생님은 '겸암정사'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다. 이후로 류운룡은 그 이름을 귀하게 여겨 자신의 호로 삼았다 한다. 부용대의 오른쪽 기슭에 자리 잡은 옥연정사는 서애 류성룡이 건축하여 [징비록]을 저술하던 곳이다. 꽃내 화천이 하회를 시계방향으로 휘감아 돌다가 방향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바꾸는 곳에 옥소(玉沼)가 있는데, 옥연정은 이 소(沼)의 남쪽에 있으므로 소의 맑고 푸른 물빛을 따서 옥연정이라 하였다.  

    서애 류성룡은 임진왜란을 슬기롭게 극복한 선조조의 명신이며 퇴계의 학통을 잇는 학자이다. 겸암의 아우인 그는 21세 때 형 겸암과 함께 도산서당을 찾아 퇴계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으며, 23세에 생원과 진사 합격, 25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어제 밤 봐두었던 서애 류성룡의 종택인 충효당, 그의 형 겸암 류운룡의 종택인 양진당 그리고 북촌댁, 남촌댁 등을 돌아다니며 특히, 지난 입춘 때 붙였을 솟을대문의 입춘방에 특히 눈길이 끌렸다. 아침 이른 시간인데도 벌써 외국인으로 보이는 관광객들이 고샅을 나처럼 돌아다니고 있다. 산불조심하자는 확성기 소리는 한시간 남짓이 지나도 기세가 꺾이지 아니하고 울어댄다. 정말 내가 다 민망하다. 알고 보니 마을의 확성기 스피커를 고치는 중이라 계속 틀어 놓은 것이었다.

  "안동에는요,
         이 간고등어가 명물이시더."

    어제 약속한 뒷집 아주머니 댁의 아침밥 약속 시간이 되어서 마당에 들어섰다. 내 어머니 같은 아주머니는 오랜만에 돌아온 귀한 아들을 위해 밥상을 마련한 듯 김이 솟아나는 하얀 쌀밥과 정성껏 끓이신 된장찌개, 그리고 고등어 자반 구이 등의 찬을 담은 밥상을 들고 부엌에서 나오셨다. 방안으로 들어가서 먹으라는 친절을 사양하고 고샅을 지나가는 나그네들도 구경하고 그들도 나를 부러워라 구경하랍시고 그냥 툇마루에 걸터앉아 수저를 들었다. 내 어머니같은 아주머니께서는 밥상 맞은 편에 마주 걸터앉으시어 자반 고등어 구이의 가시를 발라주시면서 말씀하셨다.

    "안동에는요, 이 간고등어가 명물이시더."

    이 무슨 말씀인가? 내륙도시 그것도 깊숙히 내 것을 소중히 여기고 고집하며 살아오는 양반도시라는 안동에 특산품, 명물이 이 간고등어(소금에 절인 고등어)라니? 여쭈어보았더니, "그건 내사마(나야 뭐) 잘 모르지예"라며 아주머니께서는 미안해하신다. 옛날 동해안 영덕의 생선장수는 싱싱한 고등어를 지게에 지고 내륙 지방으로 팔러 다녔는데 양반들 많이 사는 안동을 미쳐 다 오기 전에 해는 저물고, 고등어는 물이 가기 시작한다. 안동 못 미친 마을 주막에서 하룻밤을 묵는 생선장수들은 여기에서 고등어를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왕소금을 잔뜩 뿌린다 하였다. 이 소금에 절인 간고등어가 안동에 들어오면 그렇게도 맛있는 간고등어구이가 된다. 안동에만 틀어박혀 산 아이들은 간고등어 밖에는 생선이 없는 줄로 알고 있다한다. '안동답답이(또는, '안동갑갑이')라는 말이 있는데 바로 이런 이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뜨뜻한 구들장에서 하룻밤을 지내보고, ..... 무엇보다도 마을 앞 꽃내 건너 옥연정사에 가서 낮잠도 자보고, 아슬아슬한 부용대(芙蓉臺) 벼랑에 올라 꽃뫼 아래 납작하게 들어낮은 물돌이동의 자리매김새를 바라보면서 수려한 풍광과 예스러운 분위기가 연출하는 포근한 아름다움과 그 아름다움에 힘과 권위를 더해주는 '쑤'(솔밭)의 의미까지 살필 때 우리는 비로소 하회를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난 부용대에 올라가서 하회를 굽어살피지는 못하였다. 그보다는 간고등어구이 가시발라 먹여주시는 내 어머니같은 아주머니의 깊은 인정과 뜨뜻한 구들장같은 하회의 그 마음을 깊숙이 간직한 채 퇴계 선생님을 향한 길을 재촉하였다.  (2001/문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