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민관으로서, 학자로서, 시인으로서, 그리고 과학자로서 한 시대의 고통을 모두 감내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애민 애국의 길을 올곳이 걸어가신 다산 정약용선생님. 선생님이야말로 겨레의 대지성이시요 대스승이시다. 스승님을 찾아가는 나는 나에게 주어진 길은 무엇인가를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다산을 찾아서 (2) - 다산의 삶과 유배생활

다산초당 가는 길

[다산 정약용 선생님 영정]

    다산은 1762년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당시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1730-1792)이며, 어머니는 해남 윤씨로 조선시대 유명한 서화가인 공제 윤두서의 손녀였다. 다산의 자는 미용, 용보, 귀농이고 호는 삼미자, 사암열수, 다산, 자하도인 태수 문암일인 등이며 당호는 여유당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7세때 지은 '산'이라는 시가 지금까지 이를 입증해 준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으니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네'
      (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

    1777년 다산은 자신의 학문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스승을 만나게 되었으니 그가 실학의 선구자 성호 이익이다. 다산이 두 살 되던 해에 성호가 세상을 떠나 직접 가르침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다산은 이익의 《성호사설》을 접하고 경세제민(經世濟民)의 학문을 걷게 되었다.

    다산은 22세 때(1783)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이때 당시의 임금인 정조의 눈에 뛰어 인정받게 되고 이로부터 정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개혁정치의 반려자가 된다. 28세때 1789년 문과에 급제하여 본격적인 목민관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첫 벼슬인 희릉직장을 비롯하여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을 거쳤다. 이즈음 그는 '성설'과 '기중도설'을 지어 수원성을 쌓는데 녹로와 거중기를 만들어서 사용할 것을 건의하였으며 이로써 많은 경비를 절약할 수 있었다.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서는 가난하고 핍박받는 백성들의 고통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암행어사로서 그는 전 연천 현감 김향직과 전 상양 군수 강명길의 폭정을 고발하여 처벌하도록 하였으며 이를 통해 책임과 관리의 의무를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천주교와 만남도 그의 삶에 큰 비난을 가져다 주었다. 그는 23세때 천주교를 처음으로 접했다. 이벽(李蘗, 1754∼1786, 다산 큰 형수의 아내, 초기 천주교 신자)을 통해 서양문물과 천주에 대한 지식을 담은 《천주실의》라는 책을 읽는 등 한때 천주교 서적을 읽고 심취하기도 하였으나 성균관에서 학업에 정진하느라고 곧 손을 떼었다. 그는 천주교 신앙과 서양과학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기도 하였으니 또한 갖은 시련과 좌절을 맛보기도 하였다. 개혁의 주인 정조가 서거(1800년)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다산은 생애 최대의 전환기를 맞는다. 소론과 남인 사이의 당쟁이 신유사옥이라는 천주교 탄압사건으로 비화하면서 다산은 천주교인으로 지목 받아 유배형을 받게 된다. 이때 다산의 셋째형 정약종은 옥사하고 둘째형 정약전은 신지도로 다산은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 곧 조카사위인 황사영의 백서사건(1801년, 신유박해의 전말을 베이징에 있는 구베아주교에게 알리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 사형당함)이 일어나서 서울로 다시 불려와 조사를 받고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다산은 그때의 고통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버지 아십니까? 기막힌 이 일을
      어머니 아십니까? 서러운 이 맘을
      우리 집안 갑자기 뒤집히어서
      죽고사는 갈림길에서 헤메니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父兮知不知 / 母兮知不知 / 家門[炎欠]傾覆 / 死生今如斯

                                                                             - [하담별] 중에서

    강진에서의 유배기간(1801∼1818)은 다산에게는 고통의 세월이었지만 학문적으로는 매우 알찬 결실을 얻은 수확기였다. 나라는 다산을 버렸지만, 다산은 나라에 대한 충성과 백성에 대한 사랑을 잊지 않았다. 유배생활 몇 해 지나지 않은 1803년에 지은 다산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갈밭마을 젊은 여인 울음도 서러워라
      현문(縣門) 향해 울부짖다 하늘보고 호소하네
      군인 남편 못 돌아옴은 있을 법도 한 일이나
      예로부터 남절양(男絶陽)*은 들어보지 못했노라
      시아버지 죽어서 이미 상복 입었고
      갓난아인 배냇 물도 안 말랐는데
      삼대의 이름이 군적(軍籍)에 실리다니
      달려가서 억울함을 호소하려도
      범같은 문지기 버티어 있고
      이정(里正)이 호통하여 단벌 소만 끌려갔네
      남편 문득 칼을 갈아 방안으로 뛰어들자
      붉은 피 자리에 낭자하구나
      스스로 한탄하네 "아이 낳은 죄로구나"
          
      - 후략 - (*남절양 : 남자의 생식기를 자름, *이정 : 지금의 이장 정도되는 직위)
                                                 -[애절양(哀絶陽)] 중에서

     이 시의 제목은 '애절양(哀絶陽)'이다. 말 그대로 옮기면, '남자의 생색기인 양기를 자르는 슬픔'이라는 뜻이다. 다산 정약용이 쓴 글인데 조선후기의 세금거두는 제도인 삼정(三政) 중 군정(軍政)의 문란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시이다. 죽은 시아버지에게 군포를 거두는 백골징포(白骨徵布), 입가에 어미젖이 누렇게 말라붙은 갓난아이도 장정으로 취급해서 군포를 징수하는 황구첨정(黃口簽丁)의 실상이 생생하게 형상화되어 있다.

     다산은 이 시를 쓰게 된 동기를 『목민심서』에서 다음과 적고 있다.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이것은 1803년 가을 내가 강진에 있으면서 지은 시이다. 갈대밭에 사는 한 백성이 아이를 낳은 지 사흘만에 군적에 등록되고 이정이 소를 빼앗아가니 그 사람이 칼을 뽑아 생식기를 스스로 베면서 하는 말이 '내가 이것 때문에 곤액을 당한다'하였다. 그 아내가 생식기를 관가에 가지고 가니 피가 아직 뚝뚝 떨어지는데 울며 하소연했으나 문지기가 막아버렸다. 내가 듣고 이 시를 지었다"

     18년 강진의 유배생활 속에서도 다산은 좌절과 원망없이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위하는 숭고한 뜻을 소위 1표 2서(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라는 저술로 그려나갔으며, 무려 500여권에 달하는 그의 저서 대부분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유배지에서도 제자들을 모아 교육하였으며, 이들 제자들은 다산의 저술작업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유배지의 제자들로는 이청·황상·이강회·이기로·정수칠·윤종문 등을 들 수 있다.

     유배지 강진에서 다산은 또한 혜장스님과 초의선사를 만나 종교의 차이를 뛰어넘은 교유를 하면서 시와 경학을 가르치고 다도와 선을 배우면서 세상시름과 고독의 한을 달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함께 유배생활을 시작한 둘째 형님 약전의 부음을 1816년 흑산도로부터 듣게 된다.

      섬 땅은 하늘가에 외롭고
      사람은 종일토록 못 본다누나
      하늘땅은 두 줄기 눈물뿐
      생사가 몇 줄 글 속에 담겼구나.

      地共天涯盡 / 人從日下疎
      乾坤雙淚眼 / 存沒數行書

                                 -[득사형서] 중에서

    1818년 다산 선생님은 18년이라는 기나긴 유배생활을 끝내고 남양주 고향 여유당으로 돌아온다. 떠날 때는 마흔 살이었는데 강산이 두 번 바뀌어 이제 곧 환갑 볼 나이가 다 되어 부인 곁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유배지에 고뇌하며 체계화한 학문을 백성과 나라를 위해 사용해 볼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5세로 돌아가시기 그 날까지 미래의 조국과 겨레를 위해 모든 열정을 쏟아 학문을 완성하는데 몰두하셨다. 목민관으로서, 학자로서, 시인으로서, 그리고 과학자로서 한 시대의 고통을 모두 감내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애민 애국의 길을 올곳이 걸어가신 다산 정약용선생님. 선생님이야말로 겨레의 대지성이시요 대스승이시다. 스승님을 찾아가는 나는 나에게 주어진 길은 무엇인가를 스스로에게 물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