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불이 회통(會通)하던 백련사 가는 길을 나는 지금 다산선생님이 되어서 혜장을 찾아간다. 가는 길에 만난 만덕산 동백꽃은 아름답다기보다 차라리 애절하다. 돌아가신 선친께서는 동백꽃을 무척이나 좋아하셨는데.........


다산을 찾아서 (3) -  혜장과 백련사

[백련사 가는 길에서 내려본 구강포]

[동백나무 숲과 행호산성]

[차따는 아낙네들]

백련사로 가는 길

    다산초당 천일각에서 동암을 뒤로하여 백련사로 가는 산길은 오른쪽 구강포의 바다를 구경하면서 천천히 걸어도 30분이면 족히 갈 수 있는 산책로이다. 봄 햇살이 제법 따사롭게 내리쬐어 이마에 땀방울이 송근다. 이 오솔길을 따라 다산 선생님은 친구가 되어 주었던 백련사 혜장(惠藏, 1772 - 1811)스님을 만나러 다녔다. 나는 지금 다산선생님이 되어 혜장과 백련사를 찾아간다.

    그때의 백련사를 찾았던 일을 선생님은 「春日遊白蓮社(춘일유백련사)」라는 시에서 이렇게 그렸다.

    조각구름 흘러가며 흐린 하늘 개이고
    이밭에 흰 나비 펄럭이며 날을 때
    우연케도 집뒷산 나무꾼 길따라
    숲을 헤쳐 나가보니 보리밭 언덕이네.

    궁벽한 산촌 봄날 아는 노인 왔다면서
    벗없던 거친 동네 각승(覺僧)은 어질었다.
    더구나 도연명 찾은 듯 보아주어서…

     고향집 뒷산을 지나는 듯, 예전에 자주 드나든 듯 초행의 길이지만 낯설지 않고 산허리 한 굽이를 넘어서면 오른쪽으로 시야가 넓게 열리면서 구강포의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춘곤증에 졸고 있는 포구의 마을은 평화롭기만 하다.  만덕산 허리춤을 내려오니 넓은 차밭에서 수건을 두른 아낙네들이 차를 따고 있다. 다성 초의선사가 《동다송》에서 '우리나라의 차는 곡우(穀雨)전후는 너무 빠르고 입하(立夏)전후가 적당하다' 했는데 때마침 오늘이 입하(立夏)이다.

[백련사의 동백꽃]

    임진왜란이후에 쇠락해진 백련사를 중창한 행호스님이 또 다시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흙돌로 쌓았다는 행호산성이 지금도 백련사 절 앞에 흔적이 남기고 있으며, 그 뒤로 넓게 동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3,000평 규모의 이 울창한 동백숲은 천연기념물 151호로 지정된 이곳의 자랑거리이다. 이 동백꽃을 구경할 양으로 백련사를 찾아오는 이들도 많다한다. 이른봄에 피는 동백꽃의 찬란함을 지금 볼 수 없어 안타깝지만 핏덩이처럼 땅바닥으로 떨어진 꺾여진 봉오리라도 어루만지고자 그 숲 가까이에 다가갔다. 다행히 나같이 제를 찾아올 손님이 있을 거라 짐작한 듯 몇 몇 송이만 제 모습에 취하여 붉디붉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모습은 아름답다고 말하기보다 차라리 애절하다 말함이 어울린다.

 혜장스님과 다산의 만남

    혜장스님은 다산선생님이 강진으로 유배 올 당시에 백련사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해남 두륜산 대흥사의 12대강사(大講師)로 기록되는 큰스님이시다. 다산은 귀양살이가 몇 해 지난 1805년 어느 따뜻한 봄날을 맞아 백련사를 찾았는데 산을 오르던 중 젊은 승려를 만난다. 그가 바로 혜장이었다. 이때의 다산 나이는 44세이며 혜장은 34세였다.
    이후 두 사람은 지기지우(知己之友)가 되어 주역(周易)과 다선(茶禪)의 청담으로 밤을 세워가며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이후 다산과 혜장은 서로 오가면서 혜장은 다산에게서 주역을 배우고 다산은 혜장에게서 차를 배웠다. 이들의 만남으로 우리의 정신은 유불(儒佛)이 서로 다르지 아니하고 서로 만나는 회통(會通)의 전통을 만들어내었다. 나중에 다산은 혜장의 주선으로 대흥사의 말사인 강진읍내 보은산(일명 우두봉 혹은 형제봉) 아래의 고성사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보은산방(寶恩山房)'이라 이름한 이곳에서 다산은 《주역》을 저술하였고 귀양지를 찾아온 아들에게 《상례》와 《주역》을 가르쳤다.
    이렇게 마음 속의 얘기를 터놓고 학문적으로 깊은 대화를 나누던 혜장이 1811년 가을 대흥사 암자인 북암에서 40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니, 다산은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세월에서 그대 입 다무니, 산 속 숲마저도 적막하기만 하다오'라며 슬퍼하였다한다.  

백련사

[만덕산 백련사]

[백련사 비편]

    백련사는 차(茶)나무가 많아 '다산(茶山)'이라 불리는 만덕산 자락에 앉아서 강진의 도암만 구강포를 굽어살피고 있었다. 다녀온 여느 절같이 일주문이 있거나 천왕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찰 경내라 구분되는 담장 또한 보이지 않는다. 장대한 만경루(萬景樓)에 가려 대웅보전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산이 절의 마당이고 절이 곧 산이 되어 늠름하게 바다를 굽어보고 있다. 만덕산에서 나는 차를 따다 전차(錢茶)를 만들어 팔고 있는 만경루를 뒤로 돌아 만난 대웅보전은 앞을 가로 막은 만경루를 넘어보려 마지못해 높은 축대 위에 자리하고 있다. 답답한 느낌은 나만의 것일까? 가파른 산비탈에 자리하자니 어쩔 도리도 없을 듯하다.

    기록에 의하면, 839년 구산선문 중 충남 보령 성주사문을 개창했던 무염(無染)선사가 창건했다한다. 작은 절 집인 백련사가 역사의 전면으로 부상하게 되는 것은 13세기 초 무신정권이 들어서고 부터이다. 무신정권은 그들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받쳐줄 사상의 강화 내지는 재정비작업을 착수하게 되는데 이것이 이른바 불교계의 결사(結社)운동이었다. 지눌스님이 조계산 송광사에서 수선(修禪)결사를 맺으며 선종을 개혁하여 조계종을 확립하던 바로 그 시점에, 지눌의 친구이기도 했던 원묘(圓妙)스님은 이곳에서 백련결사를 조직하면서 천태종의 법맥을 이어간다. 이후 120년 간 백련사는 8명의 국사가 배출하였다한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왕조의 말기현상이 드러나고 왜구의 잦은 침략이 극에 달하여 급기야 해안변 40리 안쪽에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보니 강진만에 바짝 붙어 있는 백련사도 어쩔 수 없이 폐사가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선 불교가 민간신앙으로 크게 중흥하게 될 때  행호(行乎)스님이 나타나 백련사의 중창을 보게 된다. 그때에 왜구의 재침을 방어하고자 절 앞에 토성을 쌓았는데, 바로 다산의 초당에서 내려오는 동백나무가 숲을 이룬  곳이다. 행호스님 이후 백련사는 그런대로 사맥을 유지하여갔으나 1760년 화재로 수백 칸을 다 태우고 2년에 걸친 역사 끝에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다가 훗날 다산선생님과 이곳 주지 혜장 스님의 만남으로 백련사는 그 명성을 간직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