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살 딸아이가 날더러 왜 힘들게 산을 오르는지 묻는다. 알아들을지 말지 모를 일이지만 선문답으로 답해준다. '마음을 찾으러 간다'고. 오래 전부터 와보고 싶은 일지암(一枝庵)이었으니 마음은 벌써 일지암에 먼저 올라 나를 기다리고 있다.


다산을 찾아서 (4) - 초의선사의 일지암

두륜산 대흥사

[대흥사 일주문]

    다산의 백련사를 내려와 곧장 해남으로 향하였다. 그곳에는 서산대사와 초의선사가 계신 까닭이기 때문이다. 국토최남단 두륜산 품에 안긴 대흥사는 행정구역상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장춘동에 속하며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이다. 대흥사는 본래 '한듬절'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두륜산 본래 이름이 한듬이었기 때문이다. 국토남단에 위치하고 불쑥 솟아 있어서 한듬이라고 부른 듯하다. 이를 한자와 섞어서 '대듬'이라고 부르더니 나중에 대둔산(大芚山)로 바뀌게 되었다한다. 그러게 부르다가 언제부터인가 대둔산은 중국의 곤륜산 줄기가 백두산을 이루고 다시 한반도 태백산맥을 타고 내려온 끝자락에 생겨났다고 하여 백두산과 곤륜산에 이름을 따 두륜산(頭輪山)이라 하였다. 두륜산 대흥사가 세상에 명성을 나타낸 것은 청허당 서산대사께서 1605년 1월 어느날, 의발(衣鉢, 가사와 발우를 가리키는 것으로 선불교의 법맥을 잇는다는 상징적 의미)을 두륜산 대흥사에 둘 것을 유언하고부터 였다.

서산대사

    서산대사는 서기 1520년, 조선 중종 15년에 태어났다. 속성은 최씨이며 완산이 본이다. 이름은 여신이며, 호는 청허(淸虛)라 하였고 오랫동안 묘향산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서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휴정은 스님의 법명이다. 난세에 태어나 한평생을 선(禪)과 호국의 이념으로 살다간 그는 조선시대를 통하여 찬연한 하나의 빛이었다. 스님은 선교 양종을 통합하여 단일한 불교로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셨다. 그의 저서 [선가귀감(禪家龜鑑)]에는 "선은 부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의 말씀이다(선시불심 교시불어)"라 밝히며 선교 대립을 지양하고 불교 본연의 통일을 모색하였는데, 이는 지눌의 선교일치론을 계승한 것이다. 이러한 정신은 《선교선》, 《선교결》, 《청허당집》 등의 저술에도 잘 나타나 있다. 서산대사의 의발이 대흥사로 전수되면서 대흥사는 명실공히 선교의 총본산이 되었다. 조선의 배불 정책 그늘 속에서도 13대 종사와 13대 강사를 배출하는 등 찬연한 학풍을 꽃 피울 수 있었던 것은 서산대사의 유지 때문이었다.

    산사로 들어가는 길은 시원스럽게 넓었다. "두륜산대흥사(頭輪山大興寺)" 편액이 걸린 큰 일주문을 지나자마자 비석과 부도밭이 오른쪽으로 나온다. 넓은 뜰 가운데 나타난 해탈문의 그 낯설음에 눈길을 한참이나 빼앗겼지만 나와 일행이 이곳을 찾은 것은 대흥사가 아니라 초의선사를 만나기 위함이며 서산(西山)을 넘실거리는 해의 재촉으로 발길을 돌렸다. 북원 대웅전을 왼편으로 놓아두고 길을 오른쪽으로 꺾어 남원과 무염지(無染池)사이로 난 길을 따라 산을 오른다. 잠시 오르면 근래에 조성된 유물전시관과 초의 대선사 상을 만나게 된다. 눈앞에 보이는 표충사(表忠祠)는 서산대사, 사명당, 처영스님 등 세분의 영정을 모시고 매년 제례와 추모 행사가 받들어지는 사당이다. 절 안에 유교 형식에 따른 사당이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원융위일(圓融爲一, 원만히 화합하여 하나가 됨)하는 한국 정신의 표상 아닌가!

일지암

[다산 초당]

    그러나 나와 일행이 이곳을 찾은 까닭은 초의선사를 만나기 위함이다. 산길은 비록 가파르지만 짙은 숲 냄새과 맑은 물소리를 위안으로 오른다. 오늘 어린이날, 뜻 있게 나의 순례의 동반자가 되어준 아홉 살 딸아이가 힘에 부쳐 길가 바위 품에 엎어진다. 바위의 기운을 받을 것이라 기원하며 가푼 숨을 달랜다. 그리고 날더러 왜 힘들게 산을 오르는지 묻는다. 알아들을지 말지 모를 일이지만 선문답으로 답해준다. '마음을 찾으러 간다'고. 오래 전부터 와보고 싶은 일지암(一枝庵)이었으니 마음은 벌써 일지암에 먼저 올라 나를 기다리고 있다. 오직 한마음으로 일지암을 찾아 그렇게 오르기 20여분 남짓하다. 힘들여 올라오길 정말 잘했다. 거기에 초의스님이 있었고 일지암이 있었고 내 마음이 있었다.

[영산홍을 벗한 바윗돌은
그자체가 다감이요 다상이다.]

    일지암은 초의선사께서 홀로 다선일여(茶禪一如)의 사상을 생활화하기 위해 말년에 꾸며 살던 다원(茶園)암자이다. 누렁이 강아지가 차밭을 가로지르며 손님을 반긴다. 누렁이의 안내를 받으며 차밭을 지나 둔덕 위의 다정(茶亭) 일지암 가까이 갔다. 향수를 못내 이겨 마침내 찾아온 어머니계신 내 고향집처럼, 다정하고 다감한 일지암을 이리도 보고 저리도 보고, 앞을 보고 뒤를 보고, 한바퀴 돌아다보았다. 뒤 켠 바위 틈새로 흘러나오는 물을 여러 개의 나무대롱과 돌 물확으로 장난처럼 연결하여 찾아오는 이들의 목을 축여주고 있다. '차는 물의 신이요 물은 차의 몸[茶者水之神 水者茶之體)]'이라 하였던가? 일지암의 물로 초의의 차를 다려서 한잔 마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럴 수만 있다면 나에게도 정녕 삼매(三昧)가 달리 없을 듯하련만. 동행한 운소이(雲笑已) 정인 선생님이 일지암 주인인 스님을 찾았지만 안타깝게도 스님은 지금 아니 계신다. 삼매(三昧)의 다선(茶禪)을 얻지 못함이 두고두고 안타깝다.

[돌기둥을 연못위에 세우고 누마루를 떠받친 초의다합]

    붉은 빛 영산홍의 유혹으로 초정을 내려서니 거기가 바로 다감(茶龕)과 다상(茶床)이다. 찻잔 넣어 둘 감실 따로 필요없고, 다조 달리 둘 필요없고, 찻 상 별도 가질 일 없이 그저 영산홍을 벗삼아 지난 곡우 때 딴 차를 다려 이 바위 상에 앉아 다선일미(茶禪一味)를 즐겼을 초의선사의 그 멋을 한 번 떠올려본다.  초의선사가 그의 《두륜산 초암서》에서 "연못가에 심어진 영산홍이 피면 다홍색 꽃무리가 못에 비치어 환희의 정경 속에서 다선(茶禪)이 이루어지고, 달이 연못에 비칠 때 면 우주의 섭리가 물 속에 잠겨있는 유연한 분위기 속에서 차를 마시며 다선일여(茶禪一如)가 되는 신선의 경지에 이른다"고 말한 그 때의 모습도 그려본다.

    초정의 맞은 편에는 3칸 방과 가운데 부엌을 'ㄱ' 자 모양 꺾어 지은 기와집 부속채 초의다합이 있다. 작은 연못에 돌기둥을 세우고 누마루를 떠받치게 하여 아름다움과 운치를 더하고 있다. 근래에 지었을 법한 작은 대웅전 안에는 얼마 전에 차 잎을 따서 불전과 초의선사 전에 정성껏 재(齋)를 올린 듯한 차(茶) 멍석이 펼쳐져 있다.

    저녁 예불을 알리는 대흥사의 범종소리가 계곡의 바람을 타고 울라온다. 산새가 이에 선문답을 한다. 저 산자락 아래로 햇살을 반사하는 거울이 있어 내려보니 해인삼매(海印三昧)에 젖어있는 남해이지 않는가! 그렇게 일지암의 다정함에 취하여 한참이나 있었다.

[일지암의 대웅전]

[저 산자락아래 남해가 햇살에 비친다.]

초의선사

    성은 장(張)씨이고 이름은 의순(意恂)이며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법호는 초의(艸衣)이며, 당호는 일지암(一枝庵)인 초의선사(1786-1866)는 조선 후기의 대선사로서 우리나라 다도를 정립하신 분이다. 그래서 스님을 다성(茶聖)이라 부른다. 1786년(정조10)에 태어난 스님은 5세 때에 강변에서 놀다가 급류에 떨어져 죽을 고비에 다다랐을 때 부근을 지나는 승려가 건져주어 살게 되었다. 그 승려가 출가할 것을 권하여 15세에 남평 운흥사(雲興寺)에서 민성(敏聖)을 은사로 삼아 출가하고, 19세에 영암 월출산에 올라 해가 지면서 바다 위로 떠오르는 보름달을 바라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22세 때부터 전국의 선지식들을 찾아가 삼장(三藏)을 배워서 통달하였다.

    다산 정약용(1762∼1836), 소치 허련(1809∼1892), 그리고 평생의 친구되는 추사 김정희(1786∼1856) 등과 폭넓은 교유를 가졌는데, 특히 추사와 함께 다산초당을 찾아 유배생활 하시는 24년 배의 정약용을 스승처럼 섬기면서 유학의 경서를 읽고 실학정신을 계승하였으며 시부(詩賦)를 익히기도 하였다. 물론 초의스님은 다산 선생님께 다선(茶禪)의 진미를 더하였을 것이다. 다산은 《동다기(東茶記)》를 쓰고 초의는 《동다송(東茶頌)》을 지으며 우리 토산차를 예찬하였으니 한국의 다도는 이렇게 두 분을 만나 중흥하게 된다.

    초의스님의 사상은 선(禪)사상과 다선일미(茶禪一味)사상으로 집약되는데 특히, 그의 다선일미 사상은 차를 마시되 법희선열(法喜禪悅)을 맛본다는 것이다. 즉, 차(茶) 안에 부처님의 진리[法]와 명상[禪]의 기쁨이 다 녹아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차의 진예(塵穢, 더러운 티끌 먼지)없는 정기(精氣)를 마시거늘 어찌 큰 도를 이룰 날이 멀다고만 하겠는가(榛穢除盡精氣入, 大道得成何遠哉)!"라고 하였다. 스님에게는 차(茶)와 선(禪)이 둘이 아니고, 시(詩)와 그림이 둘이 아니며, 시(詩)와 선(禪)이 둘이 아니었다.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대흥사의 동쪽 계곡으로 들어가 일지암을 짓고 40여년 동안 홀로 지관(止觀)에 전념하면서 불이선(不二禪)의 오묘한 진리를 찾아 정진하였으며, 다선삼매(茶禪三昧)에 들기도 하였다. 한국의 다경이라 불리는 《동다송(東茶頌)》을 지어 우리의 차를 예찬하고 다도의 멋을 전하였으며, 범패와 원예 및 서예뿐만 아니라, 장 담그는 법, 화초 기르는 법, 단방약 등에도 능하였다. 이는 실사구시를 표방한 정약용의 영향과 김정희와의 교유(交遊)에서 얻은 힘이라고 보고 있다. 1866년 나이 80세. 법랍 65세로 대흥사에서 서쪽을 향해 가부좌하고 입적하였다. 평범한 일생을 통하여 선(禪)과 교(敎)의 한쪽에 치우침이 없이 수도하고 중생을 제도하였다.

    맑은 차 한잔의 맛과 멋을 스님은 이렇게 노래하신다.

[초의대선사 상]

      一傾玉花風生腋
      身輕已涉上淸境
      明月爲燭兼爲友
      白雲鋪席因作屛

    옥화 한잔 기울이니 겨드랑에 바람 일어
    몸 가벼워 하마 벌써 맑은 곳에 올랐네.
    밝은 달은 촛불 되어 또 나의 벗이 되고
    흰 구름은 자리 펴고 병풍을 치는구나.

                   - 초의선사, 《동다송》제16송 의역

다산과 초의

    2001년 6월 5일 나는 다산초당과 일지암을 다녀온 지 꼭 한 달만에 정말 가슴 벅찬 모 신문기사를 읽게 되었다. 다산의 시와 초의의 그림이 함께 실린 '백운첩(白雲帖)'의 실물을 발견하였다는 소식이다. 그리고 초의선사가 그린 '다산초당도(실물크기 : 가로 27센티, 세로 19.5센티)'사진으로 만난 그 기쁨은 마치 일지암에서 초의스님을 직접 만난 듯하고 초당에서 다산 선생님을 직접 대한 듯 하였다. 초의는 23세 때인 1809년 당시 47세로 강진에 유배중이던 다산과 첫 대면을 한 후 정신적 사제 관계를 맺는다. 1801년 강진으로 유배된 다산은 해남 윤씨 집안의 도움으로 1808년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온 상태였다. 다산과 초의는 해남의 대흥사와 강진의 다산초당을 오가며 차와 시, 그림에 대해 교학상장(敎學相長)하였다. 이번에 발견된 '백운첩'은 초의가 26세, 다산이 50세 되던 해 가을 월출산을 동행한 후 함께 남긴 시화첩이다.

[초의선사의 다산초당도 : 270*1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