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재마을 앞에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하나로 크게 만나는 두물머리, 즉 양수리이다. 두물머리 마재는 상공업의 진흥을 강조하는 이용후생학파와 농업의 혁신을 강조하는 경세치용학파의 두갈래 실학을 실사구시라는 정신으로 크게 집대성할 것을 다산 선생님에게 말없이 가르쳐 준 듯하다. (2001년 5월 13일) 


다산 정약용을 찾아서 (5) - 다산생가 여유당과 다산 묘소

여유당을 찾아서

[다산생가, 여유당 가는길]

    2001년 지금으로부터 딱 200년 전이다. 다산이 고향을 떠나 유배생활을 하기 시작하였으며, 다산의 셋째 형 정약종을 비롯한 그의 일가들이 순교한지 딱 200년 전이다. 그 아픈 역사의 현장으로 다산을 찾아간다.

     한강의 흐름은 늘 한가롭다. 서울 한강변의 올림픽도로와 강북도로는 항상 분주하다. 정신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서울 사람들을 위로하는 한강은 그래서 늘 여유가 있다. 나는 지금 내 살고 있는 일산에서 그 넉넉한 한강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며 다산 정약용 선생님의 생가와 묘소를 찾아간다. 동서울의 워커힐호텔을 지나 구리시로 달리는 도로는 5월의 아카시아 향기에 취하여 있다. 그렇게 선생님을 찾아가는 길은 눈으로는 넉넉한 한강을 맛볼 수 있고 코로는 아카시아 향기를 맛볼 수 있어서 감사하다. 팔당댐을 지나자 오른쪽으로 빠지는 '다산 정약용 생가' 라는 이정표를 만났다. 그 좁은 길을 따라 한참이나 가다 보면 능내역이 나온다. 작은 시골에 정감있게 어울리는 기차역이다. 이제 우리나라 천주교를 태동하고 실학을 집대성한 마재(馬峴)마을에 왔다.

열수한강과 마재마을

[마재마을에서 바라본 열수(洌水), 한강은 팔당호가 되었다.]

     뒤로는 유산(酉山)에 업혀있고 앞으로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 넓은 호반을 만드는 열수 한강(洌水, 열수는 한강의 이름이면서 정약용의 호이다.)변에 안겨있는 마재마을은 다산이 태어나서 죽어간 곳이며, 다산의 일생에 전개되는 수많은 사건을 일으킨 사연 많은 마을이다. '소내'라 불리기도 하고 '유산'이라 불리기도 하고 '두호(斗湖)'라 불리던 마재는 다산 큰형수의 아우인 이벽(李蘗, 1754∼1786, 1784년에 이승훈에게서 세례를 받고, 권일신과 함께 전도부의 간부로 활약한 초기 천주교 신자)이 찾아다니던 곳이요, 다산의 자형 이승훈(李承薰, 1756∼1801, 세례명 베드로, 우리나라 천주교 최초의 영세자, 순교)이 드나들던 곳이며, 다산의 조카사위인 황사영(黃嗣永, 1775∼1801, 세례명 안드레아, 황사영백서사건의 주인공, 순교)이 처가를 찾아오던 곳이었다. 또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앙을 지키다 장렬히 순교했던 다산의 셋째형 정약종(丁若鍾, 1760∼1801,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한국 최초의 조선천주교 회장, 순교)이 태어나서 자라던 곳이기도 하였으니, 마재야 말로 명실공히 서학(西學)인 천주교의 피어린 역사의 현장이 아닐 수 없다.

     정약용선생님 당시의 마재마을은 광주군 초부방 마현리였으나 지금은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이다. 마재마을 앞에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하나로 크게 만나는 두물머리, 즉 양수리이다. 두물머리 마재는 상공업의 진흥을 강조하는 이용후생학파와 농업의 혁신을 강조하는 경세치용학파의 두갈래 실학을 실사구시라는 정신으로 크게 집대성할 것을 다산 선생님에게 말없이 가르쳐 준 듯하다.  

     18세의 약용은 아버지 임소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시를 읊어 마재를 노래하고 있다.

      서둘러서 고향 마을 도착해보니
      문 앞에는 봄 강물이 흐르는구나.
      기쁜 듯 약초밭둑에 서고 보니
      예전처럼 고깃배가 보이는구나.  

      꽃이 만발한 숲 사이 초당은 고요하고
      소나무 가지 드리운 들길이 그윽하네.
      남쪽 천리 밖에서 노닐었지만
      어디간들 이 좋은 언덕 얻을 것인가?

[다산생가 여유당 전경]

    다산선생님 유적지 입구문을 들어가면 생가인 여유당이 보이고 뒤로는 다산의 묘소가 있는 동산이 보인다. 눈을 조금 왼편으로 돌리면 선생님을 모신 사당 문도사(文度社)가 보이며 입구 가까이의 왼편에는 다산기념관과 남양주시에서 관리하는 문화관이 있다.

여유당

    1801년 봄, 다산선생님은 이 집을 떠나 18년의 기나긴 유배생활을 끝내고 57세 되던 해(1818년) 가을에 백발이 성성한 초로(初老)가 되어 고향집 '여유당'으로 돌아온다. 고향사람들은 그래도 나라에 큰 죄를 짓고 유배를 당한 죄인의 집이라 그의 문 앞을 지나면서도 들르지 않았다. 또한 그의 모든 저작을 짊어지고 돌아온 지 3년이 되건만 어느 누구 함께 읽으려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다산은 하늘을 원망하거나 남을 탓하지 않으며,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며 민족의 장래를 위해 방대한 저서를 계속 써 내려간다. 유배지의 미완으로 남아있던 『목민심서』를 이곳에서 완성하였으며, 『흠흠신서』, 『아언각비』 등의 저작을 여유당에서 내놓았다. 백성들의 살림을 살찌우고 나라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실용적 가치와 물질적 기반의 변혁을 꾀해야 하고, 사고체계를 변혁시켜야 한다는 진리를 제시하며 여유당에서 여생을 보낸다.

[여유당 현판]

[여유당에서 결혼사진 촬영하는 예비 부부]

    다산의 당호이자 서재이던 여유당(與猶堂, 경기도 지정 기념물 7호)은 선생님이 친히 '겨울 내를 건너고 이웃이 두렵다'는 의미를 따서 지었다한다. 일요일이라 많은 사람들이 여유당을 찾았다. 특히, 예비 신랑신부들이 친구 들러리와 카메라 기사를 동반하여 결혼 기념 촬영을 위해 고운 드레스를 끌고 찾아왔다.

    여유당이라 이름한 까닭을 선생님은 이렇게 말하였다.

       "노자(老子)의 말에 '여(與)여 ! 겨울의 냇물을 건너는 듯하고, 유(猶)여! 사방이 두려워하는 듯하거라' 라는 말을 내가 보았다. 안타깝도다. 이 두 마디의 말이 내 성격의 약점을 치유해 줄 치료제가 아니겠는가. 무릇 겨울에 내를 건너는 사람은 차가움이 파고 들어와 뼈를 깎는 듯할 테니 몹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며, 온 사방이 두려운 사람은 자기를 감시하는 눈길이 몸에 닿을 것이니 참으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뜻 속에서 자라나는 것이 매우 부득이하지 않으면 또한 그만두며, 비록 매우 부득이하더라도 남이 알지 못하게 하고 싶은 것은 또한 그만둔다. 참으로 이렇게 하면 세상에 일이 있겠는가. 내가 이러한 의미를 해득해낸 지가 6, 7년이나 된다. 당(堂)의 이름으로 하고 싶었지만 이윽고 다시 생각해 보고 그만두어버렸다. 초천(苕川)으로 돌아옴에 이르러 비로소 써 가지고 상인밖에 써서 붙여놓고 아울러 이름 붙인 이유를 기록해서 아이들이 보도록 하였다."     <다산산문선집/정약용 저, 박석무.정해렴 편역/현대실학사에서>

도산서원도 일부, 강세황 그림

[여유당 마루에서 딸, 소헌이랑]

     이곳은 1801년 홍씨 부인이 다산선생님을 유배지로 떠나보낸 후 18년 동안이나 단장(斷腸)의 한으로 살아야 했던 집이며, 또한 다산선생님께서 해배되어 세상을 떠나시기 전까지 18년 동안을 부인과 자녀들의 위안을 삼으면서 실학을 집대성한 학문의 산실이다. 다산서거 100주년(1936년)을 기념하여 간행된 154권 76책의 <여유당전서>도 그의 당호 '여유당'에서 빌려 온 것이다.

    한복과 드레스로 곱게 차려 입은 예비 새색시 새신랑은 200년 전, 다산 선생님과 홍씨 부인께서 감내하신 그 고통을 얼마나 알까 모를 일이지만 여유당의 뜻을 사진에 열심히 담고 있다. 생가의 안채는 'ㅁ'자로 이루어졌으며 봄 햇살을 받아 더욱 아늑하다.

다산의 묘

    여유당의 뒷문을 나와 생가 바로 뒤편 언덕 위에 있는 선생님의 묘소를 찾았다. 해배되어 고향으로 돌아오신 선생님은 유배지에서 못다 한 저술작업을 마무리하며 못다 한 부부의 정을 달래시면서 사셨다. 하지만 세월은 야속하게도 60년 전, 연지곤지 찍고 꽃가마 타고 온 열다섯 살 새색시를 맞던 바로 그 날, 76세의 선생님을 거두어 간다. 그때가 1836년이다.

    선생님은 죽어서도 멀리 떠나지 아니하고 사랑하는 가족과 고향집을 살피고자 '집 뒤의 자(子) 방향 언덕'(屋後負子之原) 뒷 동산에 묻히셨다. 두 강물이 하나되어 만나는 열수(洌水) 한강을 내려보며 고향 마재를 굽어살피는 선생님의 묘는 아담한 곡장(曲墻)으로 둘려져 있고, 앞에는 퇴계선생님과 율곡선생님의 묘처럼 검소하게 상석 하나와 묘비만이 서 있을 뿐이다. 묘비에는 "문도공다산정약용 숙부인풍산홍씨 지묘"라 새겨져 있어 부부 합장 묘임을 말해준다.

    사랑하는 남편이 살아서만 돌아오기를 기다린 18년이란 세월이 어디 짧은 세월이던가. 부인 홍씨의 가슴은 온통 저 비석만큼이나 새까맣게 탔을 것이리라. 죽기 전 다산은 회혼일에 맞추어 시를 짓는다.

      육십 평생 바람개비 세월이
      눈앞을 스쳐 지나는데
      무르익은 복숭아 봄빛이
      마치 신혼 때 같아라.

    선생님께 참배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4월부터 우리 겨레의 스승을 찾아다니는 나의 마지막 순례이다. 향을 사리진 못하였지만 퇴계, 율곡, 수운선생님께 드린 것처럼 경건한 마음으로 선생님 묘전에 재배 올렸다. 생을 마감하시는 그 날 까지 오직 백성과 나라를 걱정하시며 열정으로 한평생을 사시다 가신 겨레의 대 스승 앞에 제가 감히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마음 속으로 여쭈었다. 선생님께서 회갑을 맞이하여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경계하신 [자찬묘지명]의 말씀을 되새기며 선생님의 묘소를 내려온다.

[문도공 다산 정약용 선생님 묘소]

[겨레의대스승 전에 재배드렸다.]

      네가 너의 착함을 기록했음이
      여러 장이 되는구려.
      너의 감추어진 사실을 기록했기에
      더 이상의 죄악은 없겠도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사서(四書) 육경(六經)을 안다"라고 했으나
      그 행할 것을 생각해 보면
      어찌 부끄럽지 않으랴.

      너야 널리널리 명예를 날리고 싶겠지만
      찬양이야 할 게 없다.
      몸소 행하여 증명시켜 주어야만
      널리 퍼지고 이름이 나게 된다. 

      너의 분운함을 거두어들이고
      너의 창광(猖狂)을 거두어들여서
      힘써 밝게 하늘을 섬긴다면
      마침내 경사(慶事)가 있으리라.

문도사

[다산선생님 사당, 문도사]

    한강을 보며 선생님의 묘소 왼쪽으로 내려오면 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지내는 사당 문도사가 나온다. 국운이 다해가던 1910년 고종은 7월 정이품 정헌대부(正憲大夫) 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을 추증(追贈)하고 문도공(文度公)이라는 시호를 내리는데 그 뜻은 박학다식하니 '문(文)이요, 마음이 뜻을 제압할 수 있으니 '도(度)'라 하였다. 사필귀정이라 하였던가! 궁핍한 백성들의 생활은 안중에도 없이 오직 권력투쟁에 여념이 없던 노론 집권층들에 의해 20여 년에 가까운 억울한 유배생활과 정치적으로 불우한 말년을 보낸 다산을 비록 늦기는 하였지만 세상은 잊지 않고 기억한 것이다.

다산기념관과 문화관

[다산 기념관]

    다산 기념관은 다산의 영정과 실학사상이 담긴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의 저서 및 집필기록, 산수화 등을 전시하고 있다. 수원성 축조 시 사용되었던 거중기와 녹로를 그대로 재현하여 전시하였으며, 또한 다산초당과 천일각 등의 유배지 생활 단면을 이해할 수 있는 조형모형을 만들어 이해를 돕고 있다.  기념관 왼쪽에는 남양주시에서 관리하는 다산 문화관이 있다. 이곳에서는 다산 정약용선생님의 사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전시하고 영상으로 다산선생님의 생애와 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 교육관으로 활용하는 공간이다.


    선생님께서 굽어살피신 마재마을의 강변으로 나갔다. 마을은 도회지 사람들의 까다로운 입맛을 위해 유기농법의 농사를 많이 짓고 있다. 호수가 된 마재의 한강은 서울의 한강보다 더더욱 넉넉히 펼쳐져 있다. 강변의 벤치에 앉아 커피한잔을 마시면서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두 강이 하나로 만나는 저 멀리 두물머리를 바라본다.